나도 여기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어 조심스럽지만, 이전에 비해 인터넷이 너무나 유독해졌음을 느낀다.
내가 처음 인터넷을 접했을 때는 이 공간이 생경했고, 모두가 화면 너머에 실제 사람이 있음을 인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자정작용이 있었다. 규범이 있었고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 위에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균열이 생긴 첫 번째 요인은 익명 커뮤니티의 활성화다. 익명 커뮤니티가 '솔직함'을 무기로 하고 의견 개진에 부담을 줄인 점이 매력이 되어 급속히 성장했다. 그리고 페이지랭크를 등에 업고 구글 등의 검색엔진을 통한 SEO로 커뮤니티에는 더욱 큰 가치가 생겨 지금도 한국 인터넷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다음 요인은 파편화와 알고리즘이다. 이전에는 다 같이 모인 공간에서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정해진 룰 위에서 자정작용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기술이 낙후되어 차단 기능 자체도 없었다. 좋든 싫든 글을 봐야 했고, 운영자가 제재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차단 기능이 없는 커뮤니티를 찾기 힘들다. 모두가 본인이 듣고 싶은 글만 보고 챔버 효과로 그들의 목소리는 강화된다. 많은 시간을 가진 사람이 기억과 기록을 본인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여긴다.
이러한 기술들은 체류 시간과 활성 지표를 향상시키고, 기업의 수익화를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편리해짐으로써 유저들간의 기본적인 존중과 예의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인터넷 공간에서만 일어난 일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생각을 잠식한다. 이제는 카페에 올라온 누가 쓴 지도 모르는 글이 지상파 뉴스의 한 꼭지를 장식한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혐오하는 의견이 허구한날 올라오며, '좋아요'의 숫자로 이전같으면 그냥 헛소리로 치부될 의견마저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다들 스크린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잊은 것 같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실은 그래서 마땅한 답은 없고 이 문제는 인터넷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개인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이 문제가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할 수는 있다. 다시 온라인에서 탈출해 오프라인으로 회귀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편향된 사고를 가질 수 있어 차단 기능을 쓰는 것은 싫어하지만, 의견의 다름과 상관없이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이들은 차단한다.
AI가 중간 버퍼의 역할을 해준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 생각을 굳이 익명의 타인과 공유하며 상처를 받지 않아도, 대중의 생각을 필터링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AI 에이전트와 대화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감정 소비도 덜하다.
오랫동안 인터넷 위에서 비즈니스를 해왔던 나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젠 모니터 밖으로 시야를 돌려 새로운 기회를 찾을 때가 된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간 나마저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까.
]]>오늘로 게임 서비스를 완전히 종료한 지 하루가 지났다. 코드는 삭제했고, 모든 결제금은 환불했다. 4개월 동안의 여정을 돌아보며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본다.
1월 초, 8년 전 내가 만들었던 게임을 새롭게 부활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목표 DAU는 100명 정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일단 오픈하는 것에 초점" - 당시 일기에 적었던 내 목표는 상당히 겸손했다. 한편으로는 용돈벌이를,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매미성을 보고 왔을 때의 감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 사람이 20년간 지속해서 만든 그 성을 보며, 나도 그런 꾸준함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그것이 내게 게임 개발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3월 1일, 게임을 오픈했을 때 나는 "한 20명 정도만 와도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입했다. 예상치 못한 성공이었다. 기쁨과 함께 첫 번째 불안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속에 "이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만족하는 사람들만 남기자, 모두를 만족시키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실제로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일부 유저들이 내 게임이 과거 버전과 달라진 점을 지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사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내 성격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집요함'이다. 한번 시작한 일에 깊이 몰입하는 이 특성은 과거에 나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게임의 세세한 디테일을 챙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동안 내가 만든 대부분의 서비스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 특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집요함이 양날의 검이 되었다. 유저들의 의견과 피드백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강박이 생겼다. "혹시나 게임이 내가 안보는 순간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휴가 중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내가 겪은 가장 큰 혼란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 게임을 '취미'로 시작했다. 그런데 유저가 늘어나고, 책임감이 커지고, 수익화를 시작하면서 점점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을 요구받게 되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것"과 "유저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 사이에서 나는 갈등했다. 한편으로는 유저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페이스를 유지하고 싶었다.
어떤 유저들은 "돈을 벌면 취미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들의 논리는 내가 돈을 받는 순간 이것은 더 이상 내 취미가 아니라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서비스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알지 못했다.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유저들과의 소통이었다. 내가 건강상 이유로 스트레스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일부 유저들은 "대충 해달라"는 답변을 보냈다. 그들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 말이 내 노력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어떤 유저들은 "운영자 너는 게임 만들줄 모른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는 투로 나를 가스라이팅했다. 그들의 비판은 종종 게임의 특정 기능이나 시스템에 대한 건설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인신공격처럼 느껴졌다.
내가 과거에 게임을 종료했을 때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올랐다. 그때도 유저들의 비판과 요구에 지치고 무너졌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괴롭혔다.
나는 P2W(Pay to Win)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업데이트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결정에는 일종의 감정적 대응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액만 결제하거나 무료로 게임을 즐기면서도 많은 요구사항을 제시하는 유저들에 대한 내적 불만이 쌓여있었다. '이 정도 투자로 이렇게 많은 것을 원한다면, 차라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하자'라는 복잡한 심정이 내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예상했던 대로 유저들의 반발은 즉각적이고 거셌다. 그 날의 피드백을 받으며 나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지속할 에너지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서 게임 종료를 결정했다. 모든 결제금을 환불하고, 코드를 완전히 삭제했다.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해방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치 오랫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은 "앞으로 내 인생에서 다시 이 게임들을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창작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마도 다른 형태로, 더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내 한계와 강점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집요함과 디테일에 대한 민감성은 양날의 검이지만, 올바른 환경과 경계 안에서는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다. 게임 개발이든, 다른 어떤 활동이든, 그것이 내게 기쁨을 주고 지속 가능하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이 4개월의 여정을 감사함으로 마무리한다. 모든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나를 더 성장시켰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나서, 앞으로 다시 사업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연히 접한 Paul Graham의 'Ramen Profitable'이라는 에세이를 읽고 제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Graham은 이 글에서 큰 투자 후 큰 수익을 창출하는 기존 스타트업의 통념과 달리, 창업자들의 기본적인 생활비를 겨우 충당할 수 있는 비즈니스에 대해 다룹니다. 제가 만들었던 회사도 이렇게 시작했었고, 이후 큰 투자를 유치하게 되었는데요.
그 때로 돌아가 제가 왜 55억원의 투자 금액을 유치하였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그 당시 서비스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회사의 비즈니스에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기세에 이어서 더 큰 규모의 회사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경험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투자를 받게 되면 대외 인지도가 높아져 후속 투자 유치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더 큰 자본을 조달할 때의 책임감에 대해서도 겪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큰 돈을 받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를 감당하기란 생각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투자를 받게 되면 후속 자본 유치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더 큰 성장에 대한 압박도 받게 됩니다. 제가 운영했던 회사는 계속 흑자를 달성했었지만, 그럼에도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성과를 달성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감을 상당히 느꼈습니다.
외형적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서 더 많은 인력과 자본이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늘렸지만, 기대한 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사람에 대한 고민만 더 늘어났습니다. 다른 회사와 비교하며 조바심을 내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제 모습도 볼 수 있었고요.
명확한 방향을 정해놓지 않고 투자를 받아서였는지, 앞으로 회사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끝없는 고민이 있었지만, ‘주주가 기대한 만큼의’ 외형적 성장을 이뤄낼 마땅한 묘안을 찾기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켜 봅니다. 저에게 정말로 투자가 필요했을까요? 우리 회사는 전형적인 Series B Trap[1]에 갇혀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글의 내용처럼 감당 불가능한 수준의 지출을 하여 회사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 또는 외부로부터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무리한 결정들이 회사의 본질을 해치고 어느 순간에는 결국 사업을 시작한 이유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투자를 받았을 때 투자사에게 10배의 투자금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기업 가치를 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내수 시장에서 이 정도의 규모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시리즈 A 기업 가치를 100억으로 봤을 때, 1000억의 기업 가치를 만들려면 PER 20 기준 연간 5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해야 합니다.
성장 단계에 있는 회사에 이러한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키겠다는 약속으로 투자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당시의 저는 이런 책임의 무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투자 이후의 밝은 청사진에 눈이 멀어 있었죠.
물론 큰 이익에는 큰 책임과 리스크가 따릅니다. 창업가에게 리스크를 견딜 수 있는 자질이 있다면 충분히 해 볼만한 선택이 됩니다. 지난 창업에서 느낀 건, 저 혼자서 시작했고 혼자서 운영을 감당할 수 있는 서비스라면, 굳이 외형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직원을 고용함으로써 생기는 인사 조직관리의 어려움은 물론, 사무실 비용 등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비용들이 추가로 발생하게 됩니다. 제품 개발과 별개로 피드백과 성과 관리에도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하고,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이를 바로 잡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어쩌면 회사가 망할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찌든 때가 되어 회사의 문화에 침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결국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건강을 해쳐가면서 이런 성장을 강요받고 있는 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죠. 당장 오늘 하루가 행복해야 하는 저에게 있어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회사가 유니콘을 목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저는 이제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사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더 큰 회사보다 혼자서 오랫동안 서비스한 회사들에 더 눈이 가고, 더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2]. 오래 가는 회사를 만드는 것은 철저한 비용 통제와 규율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저는 앞으로 급격한 성장보다는 지속 가능한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받아들이고, 이런 방향이 저에게 더 잘 맞는 옷이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시리즈 B 투자
유치 후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현상. 이
글을 참고하세요.
[2] 이런 비즈니스를 Lifestyle business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도 참고하세요.
우리 회사에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다 보면,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심복', 즉 '마음 놓고 부리거나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1]
지난 10년간의 창업을 돌이켜 보면 우리 회사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직원은 없었습니다. 1인 기업으로 시작해서 운 좋게 회사를 수익을 낼 수 있는 궤도에 올렸지만, 절반의 시간은 제가 혼자서 이끌어왔습니다. 저 스스로가 나르시스트적인 성향이 있었고, 굳이 심복이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이에게 맡기느니 제가 직접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일해 왔었죠.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더 큰 성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저는 위임의 필요성을 깨닫고 직원 규모를 늘렸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폐업한 지금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 저와 함께했던 이들 중에서 진정한 심복이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심복이라고 착각하고 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회사가 잘 나갈 때는 수년간 근속한 직원들의 충성심에 감사해하며 그들을 심복이라 여기고, 금 몇 돈을 선물해 주고 축하해 주기도 했습니다. 심복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회사가 성장을 멈추고 정체하면서부터 였습니다. 회사가 위기에 직면하자마자, 그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태업을 하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다양한 핑계를 들어 미련없이 회사를 떠나더군요.
그제서야 저는 '심복'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회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옆에서 지켜보고, 회사의 어려운 순간에 좌충우돌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죠. 개인의 이익을 넘어 회사의 이익을 조금이나마 더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이들이 모여 회사의 DNA가 만들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회사가 어려울 때일수록 심복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모두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며, 회사를 경영하는 대표의 입장에서는 절망스럽고 안타까운, 때로는 인류애를 상실하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난관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동반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설득이 안되는 일들을 되게끔 만들고, 회사의 분위기를 다잡아 주는 데 심복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대부분의 직원은 대표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대리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대표의 뜻을 잘 이해하고 이를 구성원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조직에 반드시 필요하며, 심복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에게 강력한 심복이 있었다면, 위기 상황에서 직원들을 설득시키고 동기부여하는 과정이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분명 창업자에게는 내 뜻을 따라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그들을 고인물이라 비난할 수 있지만, 회사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아는 이들이 회사에 남아있다는 것은 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심복의 입김이 너무 세진다면 팀 간 분쟁, 의견 충돌로 인한 갈등과 같은 부작용 또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심복이 부재함으로써 생기는 어려움들을 깨달았으니, 다음 창업 시에는 이를 보완해서 좀 더 단단한 팀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누가 좋은 심복인가, 어떻게 찾아내고 키울 수 있을까는 저에게 놓여진 새로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1] 이 단어가 다소 권위적으로 들릴 수 있음에도 '동료'라는 표현 대신 선택한 이유는, 스타트업에서는 의사결정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결정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권한이 필요하니까요.
]]>Paul Graham의 Founder Mode를 읽고 든 생각입니다.
10년 간 운영하던 회사를 폐업한 이후 만난 분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내가 '만드는 것'은 잘 할 지 몰라도 '경영을 하는 것'은 잘 못했던 것 같다는 얘기를 계속 몇번이고 되뇌였습니다.
'만드는 것'과 '경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습니다.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은 창업자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경영은 팀원들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경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각종 SNS와 책들을 뒤졌고, 모두가 하나같이 '위임'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위임은 회사 성장을 위한 만능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대표가 너무 과도하게 마이크로매니징을 한다고 불평하면서도, 정작 그들에게 기회를 줬을 때는 양질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위임은 단순히 본인의 낮은 퍼포먼스를 감추려는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죠. 또는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거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위임을 하고 나서도 본인에게 주어진 자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년간의 노력 끝에, 회사의 성장은 정체되고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동안의 행동과 생각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저는 너무나 많은 글들과 피드백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페이스북/링크드인 같은 SNS, 각종 경영 전문가들의 도서, 직원들의 피드백, 잡플래닛 리뷰까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 회사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성장을 도와주겠다'는 말로 접근했지만, 우리 회사에서 무언가를 가져갈 수는 있어도 어려움을 함께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시중의 경영 서적이나 일반론적인 조언들은 대부분 '전문 경영인'을 위한 것입니다. 전문 경영인은 회사에 궁극적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본인의 연봉 값어치만 증명하면 되고, 실적이 좋지 않아도 다른 회사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기 실적을 위해 회사의 근간을 흔들거나, (자신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직원 복지에만 집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업자의 마인드셋은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소신을 갖고, 세간의 비난과 이견은 한귀로 흘리며, 장기적 관점에서 회사를 위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모두를 포용하지 못하고 불안감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창업자의 숙명입니다.
내가 고용한 사람들, 나에게 조언을 주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내 이해관계는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 밖에 없으므로, 목표를 위해 그들을 잘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임이 필요하다며 무작정 맡기고, 성과가 나오지 않아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PG가 말한 '전문 사기꾼을 고용해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겠죠.
왜 사업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그 답에 맞는 경영 방식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창업자로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